2009년 09월 08일
불경의 위경 논쟁. 나도 한마디는 해야될 것 같아서...
권오민 경상대 교수, "대승 불설 부정은 '무지' 탓"
마성 스님, 권오민 교수 "아함도 비불설" 주장 반박
권오민 교수, "아함도 부파가 승인한 불설일 뿐"
마성 스님, "니까야 부정은 곧 불교사 몰이해"
권오민 교수, "니까야만 불설 주장은 맹목일 뿐"
니까야 친설 논쟁, 학계 달구다
니까야 친설 부정은 몰역사적 주장
간만에 불교계에서 아주 오래 묵은, 그러면서도 항상 핵심을 제대로 건드리지 못하고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며 좋은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덮고 넘어가던 붓다의 직설 논쟁이 이번에 제대로 터진 느낌이다. 더군다나 여기에 대한민국에서 빨리어 경전의 권위자이신 전재성 박사님까지 가세를 했으니 확실히 판이 커지긴 무척 커졌다.. 평소 권오민 교수님을 좋게 생각했는데 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하셔서 개처럼 사방팔방으로 까이시는가 모르겠다. 물론 권오민 교수님의 심정을 내 모르는 바는 아니다. 대승불교권에 속하는 한국으로선 사실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니 말이다.
아무튼 나도 이번 기회에 이 부분에 관해서 그냥 넘어갈 순 없어서 한마디만 하고자 한다.
원래 불교가 중국에 전해지는 초기부터 이 위경 논쟁은 참 첨예한 문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산넘고 물건너 수만리 넘는 길을 넘어온 경전이니 그것이 부처님이 직접 말한 것인지, 아니면 어떤 떠돌이가 술취해서 주절댄 것을 심오한 진리라고 착각하여 경전에 써넣은 것인지 직접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같으면 직접 비행기 타고 가서 확인해보던가, 심지어 인터넷으로 몇번 검색해보면 다 알겠지만 옛날엔 중국에서 인도 한번 가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으니 이런 현상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또한 여기서 더 큰 문제가 발생했는데 바로 불교가 소승과 대승으로 갈라진 것이다. 기록에는 소승과 대승은 서로를 악마에게 유혹당한 타락한 교단이라고 비난했으며 심지어 같은 우물에선 물도 안떠다 먹을 정도로 극히 사이가 안 좋았다고 전해진다.
당연히 이렇게 첨예하게 대립을 하다보면 자기가 정통이라는 명분을 만들기 시작하는데, 안타깝게도 역사적으로나 교리적으로 보면 정통성은 소승불교쪽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대승불교에선 정통성이란 명분을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경전을 창조해내게 된다. 우리에게 친숙한 팔만대장경의 수많은 불교경전들(이를테면 법화경이니 화엄경이니 하는 것들)이 사실은 이렇게 만들어진 가짜 경전(위경)인 것이다.
여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불교가 중국에 전해지기 시작한다. 중국이 어떤 나라던가? 중화라는 자존심 하나로 먹고 사는 나라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론 짝퉁의 천국인 나라이기도 하다. 당연히 중국인들에 의해서까지 적극적으로 수많은 위경이 창조되어 석가모니의 이름을 달고 나오게 된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원래 무엇이 붓다의 직설인가는 끊임없는 고민이었다.
그러다 중국에서 경전이고 뭐고 다 필요없다는 불립문자(라고 쓰고 무댓뽀 정신이라고 읽는다)를 제창한 선종(이라고 쓰고 중국노장철학이라고 읽는다)이라는, (공산주의 좌파랑 상당히 비슷하게 포악하고 괴악스런) 사상이 출현하면서 이 문제는 수면밑으로 가라앉으며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채로 세월이 흐르게 된다. 그러다 18세기 들어와 일본의 에도 시대에 도미나가 나카모토라는 사람이 이 문제를 직접 거론하며 대승의 경전은 붓다의 직설이 아니라는 대승비불설을 제기하게 된다. 물론 이 학설이 제기되자마자 일본의 학계는 난리가 나고 격렬한 논쟁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하여 결론적으로 설사 대승경전이 붓다의 직설이 아니라 할지라도 붓다의 진의와 어긋나지 않으니까 직설로 볼 수 있다는... 어찌보면 좋은 게 좋다는 식의 동양인 특유의 어정쩡한 타협으로 결론이 나고 만다.
이를테면 이러한 논리를 비유로 설명하자면, <이기적 유전자>란 책의 원래 저자는 리차드 도킨스이지만 그래도 다윈이 제창한 진화론의 진의에서 별로 어긋남이 없으니 <이기적 유전자>란 책도 다윈의 저작이라고 보자는 식의 논법인 셈이다.
거짓말 하지 말라고 신도들에게 가르치는 불교가 이런 쌩구라를 치고 있으니 정말 알고보면 기가 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다 또 역사가 흐르며 이젠 여기에 서양의 학자들까지 가세하기 시작한다. 서양의 학자들은 방대한 동양의 불교 경전들을 수집함과 동시에 번역까지 다 하면서 서구합리주의를 바탕으로 상세하게 고증하고 분석하였으며 그 결과 붓다의 직설에 가장 가까운 것은 동남아시아에서 전해져오는 니까야 경전(중국경전으로 보자면 이 니까야가 아함경에 해당된다)이라는 사실을 고증하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한국불교는 이렇게 밝혀진 사실을 은폐하며 세계적 흐름과 동떨어진 채 우물안 개구리처럼 산중은거와 기행이나 일삼으며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었던 것이 현실이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니까야라고 해서 완벽한 붓다의 직설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의 춘향전이 구전으로만 전해져 내려왔다고 가정을 해보자. 그렇다면 시간이 흐르며 변화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시대에 맞게 문법이나 어법적인 변화가 생길테고 내용에 있어서도 일부 가감이 있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춘향전의 기본 뼈대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을 여러 논리적 증거들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니까야 역시 이와 같다고 볼 수 있다.
권오민 교수는 결코 말꼬리를 잡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마성 스님은 “아함이나 니카야도 개변 증광되었고 전승과정에서 불설이 아닌 내용도 많이 포함되었지만,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 붓다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비롯되었다’는 말과 ‘친설’은 분명 그 의미가 다르다라는 괴악스런 주장을 하는데 '비롯되었다'라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했으면 한다.
춘향전이 물론 훨씬 더 오래전에 있었던 원조춘향전에 바탕을 둔 것이고 그 원조춘향전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혹은 각 지방에 따라 약간씩의 사투리, 단어, 문법적 차이가 있는 춘향전으로 되었을때 우리는 그것이 원조춘향전에서 비롯되었다라고 표현하며 사실상 원조춘향전과 같다고 생각한다.
니까야 경전 역시 같은 이치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각 지방별로 전해지는 춘향전의 최초원전이 어떠했을지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추론해보는 것은 아주 큰 의미가 있으며 반드시 병행되어야 할 일이다. 그렇다고 각 지방에 전해진 춘향전이 원조춘향전과 전혀 다르다고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근데 권오민 교수는 여기서 괴상한 패악질을 부린다.
또 예를 들어 보겠다.
춘향전이 조선시대로부터 전해지며 각 지방별로, 혹은 계층별로 여러 판본의 춘향전이 나왔고 그래서 춘향전 보존을 표방하는 여러 협회가 나왔다고 가정을 해보자. 전라도 춘향전 보존협회, 충천도 춘향전 보존협회, 서민 춘향전 보존협회 등등 많은 춘향전 보존협회가 생기면서 각자 내가 더 원조춘향전에 맞다고 우기는 상황이라고 가정하겠다.
근데 여기에 어느날 갑자기 귀여니라는 듣보잡 작가가 떡하니 <그놈은 멋있었다>라는 책을 내놓고는 내 책도 알고보면 춘향전의 기본 뼈대와 다르지 않으니 춘향전에 끼워 달라고 주장을 하기 시작한다. 잘나고 능력있는 상류계층의 남성과 서민여성의 사랑, 정절 등등 춘향전에서 보이는 기본 뼈대가 자기 작품에도 다 들어가 있으니 자기 작품도 춘향전이라는 거다. 심지어 어차피 지금 전해지는 춘향전도 원래 춘향전과는 다르니 만약 내 작품이 춘향전이 아니면 너네도 춘향전이 아닐뿐만 아니라 내 작품을 춘향전에 안끼워넣는 것은 맹목이라는 패악질까지 부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귀여니가 자기 작품을 춘향전이라고 우기면 그걸 패악질이라고 본다. 근데 불교에선 그 패악질이 아무렇지도 않게 주장되고 있다. 그것도 교수라는 사람의 입에 의해서.... 정말 이 어처구니 없는 대한민국의 현실에 마음이 참담할 따름이다...
물론 한국불교계가 이렇게 반발을 하는 이유는 잘 안다. 팔만대장경으로 대표되는 민족혼, 민족자존심. 그리고 우리의 주체성을 지키며 불교를 발전시키고 심지어 우리의 불교를 세계에 보급하겠다는 어떤 야심과 사명감 등등...
이러한 심리가 있는 것은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닌 건 아니지 않겠는가... 귀여니의 책은 춘향전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대승불교의 창작위경들 역시 붓다의 직설이 아닌 것이다. 제발 개념을 갖고 살자... 전재성 박사님이 마지막에 말한, 그렇게 불성 강조하면 명심보감도 불경이라는 말에 주목 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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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 스님, 권오민 교수 "아함도 비불설" 주장 반박
권오민 교수, "아함도 부파가 승인한 불설일 뿐"
마성 스님, "니까야 부정은 곧 불교사 몰이해"
권오민 교수, "니까야만 불설 주장은 맹목일 뿐"
니까야 친설 논쟁, 학계 달구다
니까야 친설 부정은 몰역사적 주장
간만에 불교계에서 아주 오래 묵은, 그러면서도 항상 핵심을 제대로 건드리지 못하고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며 좋은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덮고 넘어가던 붓다의 직설 논쟁이 이번에 제대로 터진 느낌이다. 더군다나 여기에 대한민국에서 빨리어 경전의 권위자이신 전재성 박사님까지 가세를 했으니 확실히 판이 커지긴 무척 커졌다.. 평소 권오민 교수님을 좋게 생각했는데 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하셔서 개처럼 사방팔방으로 까이시는가 모르겠다. 물론 권오민 교수님의 심정을 내 모르는 바는 아니다. 대승불교권에 속하는 한국으로선 사실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니 말이다.
아무튼 나도 이번 기회에 이 부분에 관해서 그냥 넘어갈 순 없어서 한마디만 하고자 한다.
원래 불교가 중국에 전해지는 초기부터 이 위경 논쟁은 참 첨예한 문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산넘고 물건너 수만리 넘는 길을 넘어온 경전이니 그것이 부처님이 직접 말한 것인지, 아니면 어떤 떠돌이가 술취해서 주절댄 것을 심오한 진리라고 착각하여 경전에 써넣은 것인지 직접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같으면 직접 비행기 타고 가서 확인해보던가, 심지어 인터넷으로 몇번 검색해보면 다 알겠지만 옛날엔 중국에서 인도 한번 가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으니 이런 현상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또한 여기서 더 큰 문제가 발생했는데 바로 불교가 소승과 대승으로 갈라진 것이다. 기록에는 소승과 대승은 서로를 악마에게 유혹당한 타락한 교단이라고 비난했으며 심지어 같은 우물에선 물도 안떠다 먹을 정도로 극히 사이가 안 좋았다고 전해진다.
당연히 이렇게 첨예하게 대립을 하다보면 자기가 정통이라는 명분을 만들기 시작하는데, 안타깝게도 역사적으로나 교리적으로 보면 정통성은 소승불교쪽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대승불교에선 정통성이란 명분을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경전을 창조해내게 된다. 우리에게 친숙한 팔만대장경의 수많은 불교경전들(이를테면 법화경이니 화엄경이니 하는 것들)이 사실은 이렇게 만들어진 가짜 경전(위경)인 것이다.
여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불교가 중국에 전해지기 시작한다. 중국이 어떤 나라던가? 중화라는 자존심 하나로 먹고 사는 나라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론 짝퉁의 천국인 나라이기도 하다. 당연히 중국인들에 의해서까지 적극적으로 수많은 위경이 창조되어 석가모니의 이름을 달고 나오게 된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원래 무엇이 붓다의 직설인가는 끊임없는 고민이었다.
그러다 중국에서 경전이고 뭐고 다 필요없다는 불립문자(라고 쓰고 무댓뽀 정신이라고 읽는다)를 제창한 선종(이라고 쓰고 중국노장철학이라고 읽는다)이라는, (공산주의 좌파랑 상당히 비슷하게 포악하고 괴악스런) 사상이 출현하면서 이 문제는 수면밑으로 가라앉으며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채로 세월이 흐르게 된다. 그러다 18세기 들어와 일본의 에도 시대에 도미나가 나카모토라는 사람이 이 문제를 직접 거론하며 대승의 경전은 붓다의 직설이 아니라는 대승비불설을 제기하게 된다. 물론 이 학설이 제기되자마자 일본의 학계는 난리가 나고 격렬한 논쟁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하여 결론적으로 설사 대승경전이 붓다의 직설이 아니라 할지라도 붓다의 진의와 어긋나지 않으니까 직설로 볼 수 있다는... 어찌보면 좋은 게 좋다는 식의 동양인 특유의 어정쩡한 타협으로 결론이 나고 만다.
이를테면 이러한 논리를 비유로 설명하자면, <이기적 유전자>란 책의 원래 저자는 리차드 도킨스이지만 그래도 다윈이 제창한 진화론의 진의에서 별로 어긋남이 없으니 <이기적 유전자>란 책도 다윈의 저작이라고 보자는 식의 논법인 셈이다.
거짓말 하지 말라고 신도들에게 가르치는 불교가 이런 쌩구라를 치고 있으니 정말 알고보면 기가 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다 또 역사가 흐르며 이젠 여기에 서양의 학자들까지 가세하기 시작한다. 서양의 학자들은 방대한 동양의 불교 경전들을 수집함과 동시에 번역까지 다 하면서 서구합리주의를 바탕으로 상세하게 고증하고 분석하였으며 그 결과 붓다의 직설에 가장 가까운 것은 동남아시아에서 전해져오는 니까야 경전(중국경전으로 보자면 이 니까야가 아함경에 해당된다)이라는 사실을 고증하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한국불교는 이렇게 밝혀진 사실을 은폐하며 세계적 흐름과 동떨어진 채 우물안 개구리처럼 산중은거와 기행이나 일삼으며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었던 것이 현실이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니까야라고 해서 완벽한 붓다의 직설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의 춘향전이 구전으로만 전해져 내려왔다고 가정을 해보자. 그렇다면 시간이 흐르며 변화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시대에 맞게 문법이나 어법적인 변화가 생길테고 내용에 있어서도 일부 가감이 있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춘향전의 기본 뼈대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을 여러 논리적 증거들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니까야 역시 이와 같다고 볼 수 있다.
권오민 교수는 결코 말꼬리를 잡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마성 스님은 “아함이나 니카야도 개변 증광되었고 전승과정에서 불설이 아닌 내용도 많이 포함되었지만,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 붓다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비롯되었다’는 말과 ‘친설’은 분명 그 의미가 다르다라는 괴악스런 주장을 하는데 '비롯되었다'라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했으면 한다.
춘향전이 물론 훨씬 더 오래전에 있었던 원조춘향전에 바탕을 둔 것이고 그 원조춘향전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혹은 각 지방에 따라 약간씩의 사투리, 단어, 문법적 차이가 있는 춘향전으로 되었을때 우리는 그것이 원조춘향전에서 비롯되었다라고 표현하며 사실상 원조춘향전과 같다고 생각한다.
니까야 경전 역시 같은 이치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각 지방별로 전해지는 춘향전의 최초원전이 어떠했을지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추론해보는 것은 아주 큰 의미가 있으며 반드시 병행되어야 할 일이다. 그렇다고 각 지방에 전해진 춘향전이 원조춘향전과 전혀 다르다고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근데 권오민 교수는 여기서 괴상한 패악질을 부린다.
또 예를 들어 보겠다.
춘향전이 조선시대로부터 전해지며 각 지방별로, 혹은 계층별로 여러 판본의 춘향전이 나왔고 그래서 춘향전 보존을 표방하는 여러 협회가 나왔다고 가정을 해보자. 전라도 춘향전 보존협회, 충천도 춘향전 보존협회, 서민 춘향전 보존협회 등등 많은 춘향전 보존협회가 생기면서 각자 내가 더 원조춘향전에 맞다고 우기는 상황이라고 가정하겠다.
근데 여기에 어느날 갑자기 귀여니라는 듣보잡 작가가 떡하니 <그놈은 멋있었다>라는 책을 내놓고는 내 책도 알고보면 춘향전의 기본 뼈대와 다르지 않으니 춘향전에 끼워 달라고 주장을 하기 시작한다. 잘나고 능력있는 상류계층의 남성과 서민여성의 사랑, 정절 등등 춘향전에서 보이는 기본 뼈대가 자기 작품에도 다 들어가 있으니 자기 작품도 춘향전이라는 거다. 심지어 어차피 지금 전해지는 춘향전도 원래 춘향전과는 다르니 만약 내 작품이 춘향전이 아니면 너네도 춘향전이 아닐뿐만 아니라 내 작품을 춘향전에 안끼워넣는 것은 맹목이라는 패악질까지 부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귀여니가 자기 작품을 춘향전이라고 우기면 그걸 패악질이라고 본다. 근데 불교에선 그 패악질이 아무렇지도 않게 주장되고 있다. 그것도 교수라는 사람의 입에 의해서.... 정말 이 어처구니 없는 대한민국의 현실에 마음이 참담할 따름이다...
물론 한국불교계가 이렇게 반발을 하는 이유는 잘 안다. 팔만대장경으로 대표되는 민족혼, 민족자존심. 그리고 우리의 주체성을 지키며 불교를 발전시키고 심지어 우리의 불교를 세계에 보급하겠다는 어떤 야심과 사명감 등등...
이러한 심리가 있는 것은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닌 건 아니지 않겠는가... 귀여니의 책은 춘향전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대승불교의 창작위경들 역시 붓다의 직설이 아닌 것이다. 제발 개념을 갖고 살자... 전재성 박사님이 마지막에 말한, 그렇게 불성 강조하면 명심보감도 불경이라는 말에 주목 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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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9/09/08 02:28 | 불교에 관한 고찰 | 트랙백 | 핑백(1)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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